1. 눌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달변도 아니다.
표현이 다양하거나 비유가 참신하지도 않다. 표정은 평범한 아저씨 얼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몇 번을 들어도 이 사람 이야기는 질리지 않는다.
이 사람의 유튜브 동영상에 달린 댓글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이런 댓글이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대표님의 강의 동영상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습니다."
이 사람 말이 무슨 경전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마음이 흔들릴 때 이 사람 강의를 반복해서 듣는다니 말이다.
이 사람이 전하는 메시지는 간명하고 한결같다. 주식 투자를 하라는 것, 우량 기업에 장기 투자하면 노후 대비는 절로 된다는 것, 사교육비 지출을 끊으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수식어 없이 거의 뼈대만 이야기한다.
"주식이 희망이에요. 나의 노동력의 한계를 보완하는 것이 주식이고, 나를 위해 자본이 가장 효과적으로 일하도록 하는게 주식이거든요
. 내가 놀러 가도 내가 투자한 회사들의 직원들이 나의 노후를 위해 일한다는 거예요. 너무너무 흥분되는 일이거든요. 주식 모으는 재미가 굉장해요."
금융 문맹이라는 말은 이 사람에게 처음 들었는데 정곡을 찔린 느낌이었다.
돈, 돈, 돈 하면서 살지만 정작 돈이 무엇인지, 돈을 벌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금융 문맹은 질병이고 이 질병은 전염성과 중독성이 강하다는 이 사람 지적은 통렬하다.
금융 문맹 사회는 쪼그라들고 쇠퇴하는 사회라고 확신한다.
그렇게 잘 나가던 일본이 쪼그라드는 것은 금융 문맹이라는 병에 걸렸기 때문이란다.
2000년대 초반 한 배우가 "부자 되세요"라고 말하는 광고가 유행한 적이 있다.
나를 뽑으면 모든 국민들 부자 되게 만들어 주겠다는 공약 내세우고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도 있다.
그 말에 마음이 혹한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저렇게 노골적으로 욕망을 드러내도 되는 것이냐며 혀를 차기도 했다.
돈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놓고 말하는 것은 점잖은 사람들이 할 짓이 아니었다.
부의 축적을 부정부패와 연관 지어 생각하는 시각도 여전하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돈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정직할 필요가 있어요.
정직해야 돼요.
물론 돈이 전부가 아니죠. 그렇지만 우리는 돈에 대해서 더 적극성이 필요해요
. 돈을 강조하는 이유는 돈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거든요."
돈에 대한 본능적 욕망, 노후에 대한 불안, 월급 모아서는 불가능해진 내 집 마련의 꿈,
거기에 전대미문의 전염병까지 겹치면서 '주식 투자가 희망'이라는 이 사람 메시지가 갑자기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지난해 이 사람이 출연한 동영상 조회수가 2천360만 회가 넘었다.
말 그대로 '존 리 열풍'이 분 것이다.
2. 이렇게 유명한 사람인 줄 몰랐다.
두 사람만 모이면 주식 투자를 이야기하는 시절인지라 주식 관련 인물을 만나보고 싶었다.
주식을 좀 안다는 지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이 사람을 추천했다.
인터뷰를 준비하기 전에는 이름도 모르던 사람이었지만 알고 보니 유명해도 너무 유명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운용하는 유튜브는 구독자 수가 35만 명이 넘고 이 사람이 출연하지 않은 방송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책은 냈다 하면 베스트셀러다.
이 사람을 다룬 인터뷰 기사도 넘쳐났다. 이렇게 유명한 사람을 어떻게 모르고 살아왔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사람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는 문자를 보낸 것이 1월 12일이다. 답이 없었다.
인터뷰를 거절하는 것인지 확인하는 문자를 다시 보내도 회신이 없었다.
잘 나가는 사람이니 엄청 바쁜 모양이다 싶었다. 굳이 전화까지 걸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3주쯤 지난 1월 31일 이 사람에게 카톡이 왔다.
문자 수신 기능에 이상이 생겨 인터뷰 요청 문자를 이제야 봤다며 언제든 인터뷰가 가능하다고 했다.
인터뷰 장소와 날짜를 잡는 데 격식을 따지지 않았다.
인터뷰 시간이 넉넉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만나는 시간을 앞당기자고 했다.
그래서 인터뷰는 아침 8시 30분에 시작됐다.
약속 시간보다 15분쯤 일찍 도착했는데 이 사람은 이미 사무실에서 자료를 보는 중이었다.
밤 9시쯤 자서 새벽에 일어나는 스타일이라며 사무실에 일찍 나온다고 했다.
자신이 대표로 있는 자산운용회사 직원들 가운데 가장 먼저 출근하는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 2014년 메리츠자산운용 대표로 부임했다.
그 전에는 뉴욕 월가에서 25년 간 펀드매니저와 회계사로 일했다.
대표로 부임하자 마자 팀장, 본부장 직제를 없애 버리고 재택근무제, 유연근무제를 도입했다.
여성 인력을 중용하고 사내 회식은 없애고 보고서는 메일로 대체했다.
자동차와 기사 제공 혜택을 반납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금융회사는 당연히 여의도라는 선입견을 깨고 북악산 자락으로 회사를 옮겼다.
메리츠 자산운용의 대표가 된 지 불과 9개월 만에 업계 꼴찌였던 회사를 이 분야 선두 자리로 끌어올렸다.
그 해 수익률 1위, 수탁고는 2위였다. 동종업계의 돈을 이 사람이 다 끌어 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2014년 한 언론사가 이 사람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고 '2015년은 존 리의 해'라는 기사 제목까지 나왔다.
그가 서울로 오기 전 월가에서 거둔 성공 스토리가 알려지면서 '존 리 신화'는 한층 견고해졌다.
월가의 펀드매니저로 일할 당시 3만 원대에 산 삼성전자 주식을 140만 원에 팔고, SKT 주식은 4만 원대에 사서 440만 원에 팔았다.
그가 책임자로 있던 코리아펀드는 누적 수익률이 1천600%라고 하니 누가 뭐래도 주식에 관한 한 실력이 입증된 사람이다.
여기 까지라면 성공한 투자가에 그쳤을 것이다.
이 사람은 회사 이익을 추구하고 자신의 부를 늘리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자신의 투자 철학을 대한민국에 전파하는 주식 전도사를 자임하고 나섰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제일 머리가 좋은 민족이고 제일 부지런한 사람들인데 왜 가장 잘못된 데로 가고 있는 일본을 따라갈까.
왜 부자가 되는 삶을 살지 않는 거지?
한국은 내 조국이잖아요.
내 친구들이고 친척들이니까 저한테는 이런 한국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한국에 온 직후부터 틈만 나면 여윳돈 모아 주식 투자하라고 말하더니 2018년부터는 '경제독립'이라는 다소 선동적인 문구가 적힌 버스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학교를 찾고 심지어 산후조리원까지 찾아 주식 투자를 역설했다.
대중 강연 1천 번 이상, 직접 얼굴을 마주 한 사람이 4만 명이 넘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식 투자는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주식은 손도 대서는 안 되는 것, 주식 투자는 패가망신의 지름길 정도로 여겨지던 한국 사회에서 이 사람 주장은 오래된 상식에 대한 도전이었다.
주식시장이 좋을 때는 물론 나쁠 때도 한결 같이 이런 주장을 펼쳤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8년부터 '경제독립'이란 다소 선동적인 문구가 적힌 버스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지난해 3월에도 주식을 사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주식이 엄청나게 떨어졌을 때."그럼요. 저는 주가 2,000 때도 얘기했고, 1,500 때도 얘기했어요.
무조건 사서 모아라.
주가가 최저점을 찍은 날 마침 방송에 출연 중이었어요.
'오늘도 사라, 오늘 많이 사라'고 얘기했는데 댓글이 난리예요. 부정적인 걸로…. 그때 새삼 알았죠.
한국 사람들이 정말 이런 투자를 해본 적이 없구나. 주식을 모르는구나."
2016년 이후 이 사람 회사의 수익률이 악화되자 남들에게 주식 권할 것 없이 당신 일이나 잘하라는 비아냥이 쏟아졌지만 주식에 투자하라는 주장은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지난해 기록적인 대세 상승장이 열리면서 주식이 희망이라고 역설해온 이 사람 주장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금융업계를 넘어 거의 모든 사람이 찾는 국민적 스타가 되었다.
4.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0년 4월이다. 유신독재가 막을 내리고 서울의 봄이라고 불리던 시기였다.
미국행이 혹시 정치적인 이유가 있는지 물어봤는데 그런 것과는 관련이 없다고 했다.
한국 사회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단다. 학과 홈커밍데이 때 학교를 찾은 취업한 선배들 모습에서 나도 저렇게 될 것을 생각하니 끔찍했다고 한다.
"기업에 들어가서 20-30년 일하는 것은 끔찍하다고 생각했어요.
월급도 너무 짜고…. 평생 남이 시키는 일을 하면서 사는 월급쟁이의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0년도 전에 유학을 결심한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을 텐데 이 사람에게 그리 어려운 선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 결정을 저는 굉장히 쉽게 합니다.
우리 어머니를 닮아서 쉽게 내려요. 사실 휴학을 하고 가는 방법도 있었는데 제가 자퇴를 해버렸어요. 왜냐면 결정을 번복하기 싫어서…."
건설업을 했던 아버지 덕에 집은 부유했다. 인천에서 살았던 2층 집은 '써니'라는 영화에도 잠시 보였던 저택이었다. 이 사람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죽는 일 아니면 걱정할 거 없다고 가르쳤던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초등학교 입학할 때가 되자 밥해주는 사람을 붙여 서울로 유학 보냈다.
엄마의 꿈은 막내 아들이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남들이 하는 것을 내 아들이 못할 이유가 뭐냐고 생각했다는 어머니는 통이 큰 여장부였다.
어머니에게 이 사람은 무한한 낙관주의와 맹렬한 도전정신을 물려받았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악몽이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도를 내고 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신세였다.
부친의 부도는 돈이 무섭다는 것을 알게 해 줬다.
당연히 집안은 어려웠다. 경제적 어려움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획일화된 교육시스템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선생에게서 똑같은 교육을 받는 것이 너무 싫었어요."
그렇다고 대놓고 반항을 하지는 않았다.
공부는 잘했지만 조용해서 존재감은 별로 없는 학생이었다.
이렇다 할 꿈도 없었다.
미래에 대해서, 꿈에 대해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서 장차 무엇을 할지 몰랐다는 것이다.
1978년 재수 끝에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에 합격했다. 경제학과에 가면 돈을 벌 거라고 생각했지만 청운의 꿈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국내에서 보낸 2년의 대학생 시절은 미팅을 하고 놀았던 시절로 기억했다.
미국 유학 결심은 한국에서 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좀 더 큰 물에서 놀아보겠다는 호기로움과 함께 일종의 객기도 있었다.
물론 믿는 구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에 일찍 이민을 가 의사로 일하던 큰누나는 테니스장과 수영장이 딸린 집에 사는 재력가였다.
뉴욕대학교 입학 허가서를 받은 뒤 누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때 큰누나 반응은 뜻밖이었다.
"내가 왜 네 학비를 도와줘야 되니?" 그때부터 온몸으로 미국 사회를 밑바닥부터 경험했다.
식당 서빙, 주유소 주유원 등을 포함해 서른 가지가 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을 한 이 시절이 돌아보면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학비가 비싸기로 유명한 미국 뉴욕대학교를 졸업했는데 학비는 한 푼도 안 들었다.
이 사람이 연세대학교에 들어갈 때 한 학기 등록금이 18만 원이었는데 뉴욕대학교 학비는 그 스무 배인 4천 달러, 우리 돈으로 400만 원이었다.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영어도 서투르고 미국 사회는 더 모르고, 세금이라고는 한 번도 내본 적 없는 이 청년에게 미국은 너그럽고 친절했다.
이 사람에게 미국은 말 그대로 '아름다운 나라'였다.
"제가 다닌 뉴욕대학교는 학비가 세계에서 가장 비쌀 거예요.
그런데 4년 동안 저는 학비 한 푼도 안 내고 다녔어요. 국가에서 등록금을 다 보조해줬어요….
제가 뉴욕주 담당자에게 편지를 썼죠. 내가 한국에서 온 학생인데 1년 이상 거주 요건이 안 돼 보조금을 받을 자격이 안 되는데 정상 참작을 해달라고 호소했어요.
답장이 와서 봉투를 열어보니 편지는 없고 1천800불짜리 수표가 들어있더라고요.
그걸로 학비 내고 타자기를 샀던 기억이 있어요." 이런 식으로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지원을 받아 학비를 해결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회계사 자격증을 따서 유명 회계법인에서 6년 동안 일했다.
소속 회계사만 5만 명인 이 거대한 회사는 입사한 지 3년 안에 직원의 80%가 그만둘 만큼 혹독하게 일을 시키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대신 일한 만큼 실력이 늘었다.
그 뒤에 '스커더 스티븐스&클라크'라는 투자회사로 전직했다.
"회계사 일이 너무 힘들었어요. 다른 일을 해보고 싶기도 했죠.
'스커더'가 한국에 투자를 많이 하는 회사이면서 가장 존경받는 회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전화로 취업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오라는 거예요.
인터뷰에서 당신들 한국에 투자하고 싶어 한다고 들었는데 한국말하는 사람 필요하지 않느냐 했더니…."
'용암처럼 부가 쏟아져 나오는' 월가에서 신나게 일했다.
여기에서 만난 사람들이 인생의 멘토가 되었다.
한국 출신이라는 장점을 최대한 살려 한국 관련 펀드를 운용했다.
세계를 누비면서 살았고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전 세계 자본가들에게 한국을 알리고 코리아펀드를 파는 게 일이었어요.
한국을 팔기가 너무 쉬운 거예요.
'너희들 삼성 알아, 포철(포항제철: 포스코의 옛 이름) 알아' 그러면 그렇게 좋은 기업들이 그렇게 쌀 리가 있느냐고 그랬죠.
그때만 해도 사람들이 한국을 너무 몰랐고 한국 기업들이 저평가되었던 거예요."
성과에 따른 보상이 철저한 게 미국이니 이 사람에게 주어진 보상도 당연히 컸을 것이다.
그때 얼마나 받았는지,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지난 2000년 이 사람 관련 기사에는 연봉 200만 달러가 넘는다는 말이 나온다.
자신이 부자인 것을 자랑하지 말라는 유태인들의 교훈을 이 사람은 철저히 지켰다.
다만 자신이 생각하는 부자의 기준은 말했다.
"수천억 원이 있어서 부자가 아니라 언제든지 여행 가고 싶을 때 어디든 여행 갈 수 있고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둘 수 있으면 부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5. 이 사람의 이야기는 거의 모든 게 미국으로 수렴된다.
검은 머리에 한국말이 유창하지만 이 사람의 말과 행동, 가치관을 보면 영락없는 미국 사람이다. 법적으로도 미국 시민권을 가진 미국인이다.
미국이라는 이민자 국가에서 이른바 아메리칸드림을 이루고 그 사회의 밝은 면을 온몸으로 체험한 한국계 미국인의 전형이다.
-혹시 미국과 한국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 같은 것은 없습니까.
"저는 성인이 돼서 미국에 갔기 때문에 정체성 혼란이 없었지요.
그런 면에서 저는 축복받았다고 생각해요.
순수한 미국 사람이라면 한국의 사교육에 대해서는 못 들었을 거예요.
한국의 겉만 보고 투자 여부를 결정하는 거죠. 한국인 개개인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을 테지만 저는 그런 것을 아는 거죠."
한국 이름 '이정복'이 있지만, '존 리'를 이제는 본인의 본명으로 생각한다.
미국에서 인종 차별을 경험한 적이 없다고 했다. 자신이 못 느꼈을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이 사람은 어두운 면을 보는 것에 둔하거나 어두운 측면에는 아예 시선을 주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낙관론자라는 것이 이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이다.
세상에는 좋은 것들이 많이 있는데 사람들은 왜 굳이 나쁜 것을 찾으려 하는지 알 수 없다는 태도였다.
한국 사회를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이나 흙수저라고 불리는 청년들에 대한 한국 사회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주식시장을 보는 시각도 그랬다.
"코로나라든가 정치적인 이슈는 오래 안 가게 돼있어요.
좋은 회사 주식을 싸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온 거예요. 코로나 생겼다고 삼성전자 공장이 없어지는 거 아니잖아요. 그런데 가격이 절반이 됐다,
그러면 엄청난 바겐세일 찬스가 온 건데 3개월이나 1년을 보고 투자하는 사람은 그게 두렵죠."
미국식 가치관과 태도로 무장한 이 사람을 '동학 개미'들의 지도자라고 부르고, 농민전쟁의 지도자 전봉준에 빗대 '존봉 준'(존 리+전봉준)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딘가 어색하다.
그렇지만 이 사람을 무엇이라고 부른 들 어떠랴 싶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잠자던 민초들을 일깨워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한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주식 투자라는 새로운 세상을 알려준 사람이니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이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나는 미국인인데 왜 나를 전봉준과 비교하나 하는 생각은 안 듭니까.
"좋다 나쁘다를 떠나 제가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됐다는 걸로 만족을 합니다.
주식하면 망하는 거다, 주식에 손 대면 안 된다라는 편견을 깨는 데 도움이 됐다면 저로서는 칭찬이죠.
특히 젊은 사람들이 주식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 제 역할은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 이상은 기대하면 안 되고 이제 국가가 해야 돼요."
미국식 실용주의자의 느낌이 물씬 났다. 입는 것부터 시작해서 말하는 것까지 겉멋 부리거나 폼 잡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자동차가 없다. 대중교통 시스템이 전 세계에서 가장 잘 정비되어 있는 한국에서 자동차를 가지고 다닐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남대문시장에서 옷을 줄여 입는다.
그렇다고 돈을 한 푼이라도 아끼겠다는 구두쇠 느낌은 아니다.
굳이 쓸 필요가 없는 곳에 왜 돈을 쓰느냐는 생각이 몸에 밴 태도였다.
대표가 인터뷰를 한다고 나와서 챙기는 직원도 없었고, 비서 역할을 하는 직원도 없었다.
책과 자료로 가득 찬 이 사람의 방은 대여섯 평쯤 돼 보였다.
몇조 원의 돈을 굴리는 금융회사 대표의 방 치고는 작고 소박했다.
6. 무슨 주식을 사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사서는 안 될 종목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했다.
돈 벌었다고 사옥 크게 짓고 골프장 사는 회사 주식은 쳐다보지 않는다고 했다.
월가 근무 당시 본사에서 감사 나온다고 하면 접대 준비부터 먼저 하던 회사의 주식을 판 이야기, 사람을 대하는 기본적인 매너가 안 돼 있는 경영자가 있는 회사의 주식을 처분한 이야기도 했다.
기업 지배구조에 대한 이 사람의 관심은 각별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기업 지배 구조를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더니 주식 투자가 답이란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서는 이사회가 제 역할을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국민들의 인식이 중요해요.
국민들이 주식 투자를 해서 주식이 일상이 돼야 해요. 그래야 이 문제가 일상생활에서 주된 관심이 되는 거예요."
낙관론자라고 해서 실패나 좌절의 기억이 없을 리 없다.
그런데 그 실패나 좌절을 해석하는 태도가 흥미롭다.
2008년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내세우며 이른바 '장하성 펀드'가 출범했을 때 이 사람이 실질적인 운용 책임자였다.
초기에는 화제를 일으키며 성과도 좋았지만 결국 수익률 악화 등의 이유로 2012년 이 펀드는 청산됐다.
-장하성 펀드는 실패 아니었습니까.
"성공한 것도 있고 실패한 것도 있죠. 저희는 굉장히 노력했다고 생각해요.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얘기들이 많이 있죠. 논란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장하성 펀드를 청산하자고 한 거죠.
우리가 왜 청산을 결정했느냐 하면 한국은 이르다고 생각했어요.
기업지배구조 개선은 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한국의 기업 지배구조는 어떻다고 보십니까.
"그때와 별 차이가 없죠. 저는 다른 쪽에 우리 한국에 더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새로운 마인드를 가진 젊은 투자자들이 늘어나고 있고 아이들 자금이 들어가는 게 기업지배구조 개선의 더 빠른 길이라는 생각을 하는 거죠."
본인의 신상과 행적, 가족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런 세세한 것까지 내가 왜 밝혀야 되느냐고 생각하는 듯했다.
자신이 달을 가리키면 달만 보면 되지 왜 자신의 손가락에 대해 관심을 갖느냐는 것이다.
돈으로부터 해방되고 좋은 일에 돈을 쓰고 싶다는 이 사람이 어디에 돈을 쓰는지 궁금했다.
이 사람은 자신이 한 일을 떠벌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디에 얼마를 기부했다, 누구를 도와주었다는 이야기는 많지 않았다.
-여러 가지 형태로 기부도 하시는 거죠?
"그럼요.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이미 하고 있죠.
그런데 저는 제가 왜 그런 것을 다 밝혀야 되는지 모르겠고 사람들이 왜 그런 것을 알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 사람의 가장 큰 장점은 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를 잘 안다고 하는 이야기도 거의 없다.
부자인 척하지 않고 아는 척하지 않는다.
정치에 대해서는 더더욱 아는 척하지 않는다.
자신의 정치적 지향성을 짐작할만한 발언을 거의 한 적이 없다.
7. 순도 100%의 자본주의자다.
이 사람만큼 우리에게 자본주의가 뭔가를 피부에 와 닿게 설명한 사람이 있었던가 싶다.
이 사람 말을 듣고서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자본주의 세상이란 것을 깨달은 거다.
자본주의를 믿는다면, 자본주의 체제가 무엇인가를 알기만 한다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사람 주장의 핵심이다.
노동은 자기 몸을 써야만 돈이 나오지만 주식으로 투자된 자본은 그냥 놔둬도 알아서 움직인다는 것, 그러니 돈을 벌기 위해서는 주식에 투자하라는 것이다.
이 사람처럼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온몸으로 간증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자기 스스로 일해서 만들지 않은 부, 이른바 불로소득은 떳떳하지 않은 것이라는 해묵은 고정관념이 있다.
투자를 통한 부의 획득이나 증대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이유다.
이 사람은 그게 왜 문제냐고 반박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굴려 돈을 버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악플이나 비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다. "가끔 마음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다",
"가짜 뉴스에 지친다", "상처 받을 만큼 받았다" 등등. 사교육비 지출하지 말라,
주식 사고팔고 하지 말라는 이 사람 주장이 적잖은 비판론자들을 만들어낸 모양이다.
"저와 생각을 다르게 하는 사람들도 많죠. 리딩 방을 하는 사람들, 증권회사도 저를 싫어하겠죠.
샀다 팔았다 하지 말라 그러니까. 우리 경쟁사들도 싫어하겠죠.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잘난 척하고 인터뷰하고 그럴까. 적이 될 수밖에 없죠. 또 학원들은 저를 좋아할까요.
사교육 하지 말라고 하는데."
주식은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사서 모으는 것이라고 했다.
단기간에 주식이 오를지 내릴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주식 투자는 테크닉이 아니라 철학이라고 말했다.
주식에는 전문가가 없고 자신도 전문가가 아니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사람들은 주식에 전문가가 있고 그 전문가들은 모든 것을 알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사실 저도 평범한 투자가일 뿐이에요.
예를 들면 의사는 암을 진단하면 '당신은 위암입니다'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래서 의사는 전문가죠. 주식은 그게 아니에요.
아무도 몰라요. 펀드매니저가 전문가라고 하지만 어떤 사람은 팔고 어떤 사람은 사잖아요.
각각 판단이 다른 거예요. 그러면 그중 현명한 투자가는 누구일까요.
기다릴 줄 아는 사람, 경험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 회사를 정말로 이해할 줄 아는 사람 그 사람들이 승자인 거예요."
필자와 대담하는 존 리(오른쪽)
8. 우리 사회가 이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자 전문가일 뿐인 이 사람에게 교육 철학을 묻고 가난의 원인을 따지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 사람은 단지 돈을 버는 법에 대해 말해주고자 할 뿐이다.
-돈으로 얻을 수 없는 보람이나 행복에 대해서도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면 더 설득력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나는 그쪽 전문가가 아니에요.
제가 심리학자도 아니고 행복을 사다 주는 사람도 아니에요. 나는 그저 부자가 돼라, 다 부자가 될 수 있다.
제발 나처럼 해라, 그리고 부자가 되려면 이것을 해라, 그것뿐이에요.
제가 정치하는 것도 아니고 상담소 차린 것도 아니고…."
주식 투자를 권하는 이 사람의 목소리가 이렇게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누가 뭐래도 지난해 한국 주식시장이 대세 상승장이었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이 좋지 않았다면 이렇게 주목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주식시장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잖아요. 주식이 떨어질 때 사람들이 평정심을 얻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 있죠.
우리 와이프도 그런 고민을 하죠. 저 사람들이 당신 때문에 투자했다가 실패 보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
저는 대한민국의 저력을 믿기 때문에 떨어지더라도 '주식은 다시 올라오게 돼 있다.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라고 생각하는 거죠."
인생의 정점에 와 있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돈과 명예를 움켜쥐고 있으니 말이다.
주식 투자에 내리막과 오르막이 있는 것처럼 인생도 그렇다는 것을 이 사람이 모를 리 없다.
-자신의 목소리가 한국 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요. 제게 엄청나게 많은 편지가 옵니다.
대부분 긍정적인 내용이에요.
대한민국이 이렇게 좋은 나라인지 몰랐다, 희망이 있다는 걸 알려줘서 고맙다는 내용입니다.
심지어는 감옥에 있는 무기징역 수도 저한테 연락이 옵니다.
광범위한 광풍이 불고 있는 거죠."
'이 시기, 이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라는 말이 있을 만큼 이 사람을 찾는 언론이 줄을 섰다.
개인적으로 이 사람을 보려는 사람이 많다.
이 사람에게 위안을 바라고, 이 사람에게서 투자의 근거를 찾고 싶은 것이다.
'주식 전도사'는 이들에게 담대하게 설교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의 신도들이여! 미래를 믿고 자본주의를 믿으라. 내 말을 믿으라, 믿고 기다려라 그리하면 너희가 모두 돈을 벌 것이다.
"어쨌든 제가 화두를 던졌고 제 말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고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희망을 느끼는 것은 젊은 사람들이 제 말에 동의를 해요.
가난하건 부자이건 그 사람들이 희망을 봤다고 해요. 저는 그걸로 충분해요."
이 사람이 아무리 확신을 가지고 주식 투자를 권유한다고 해도 투자에 대한 책임은 결국 투자자들의 몫이다.
지난 5년 동안 주식시장에서 상장 폐지된 기업이 134곳이나 되고 현재 주식 거래가 정지된 종목이 100개가 넘는다.
한마디로 주식시장은 곳곳에 지뢰가 묻혀 있는 '돈의 전쟁터'이다.
승자가 있으면 당연히 패자가 있다. 모두가 이기는 전쟁이란 있을 수 없다.
주식은 돈만 투자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열정과 시간 역시 투자되는데 문제는 우리의 열정과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점이다.
주식에 투자하는 만큼 다른 곳에 투자할 수 있는 열정과 시간은 줄어든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성경 말씀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부자 되는 법을 알려준다는 이 사람의 말과 글에 환호하는 우리 사회를 보면서 마냥 기쁘고 흐뭇할 수만은 없다.
우리가 열광할 것이 이것뿐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이 인터뷰는 지난 2월 24일 존 리 대표 사무실에서 양만희 논설위원과 2대 1 대담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 존 리 대표와의 인터뷰